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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의 해악 - 한겨레21 기사

마이토 2015. 7. 15. 21:57

혐오 발언을 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반론 할 수 있는 해답이 될것 같아서 기사를 따로 옮겨 본다.


기사의 원문 링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6358.html

한겨레 21 ****호

<괴담 잡기에 쓸 힘 ‘혐오표현’ 잡기에 쓰시라!>   

글쓴이: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그 중 특히 참고할만한 부분을 끌어다 왔다. 


출처: 한겨레 21 - <괴담 잡기에 쓸 힘 ‘혐오표현’ 잡기에 쓰시라!>


현실적·구체적인 혐오표현의 해악

괴담 문제에 쓸데없이 열을 올리는 사이 정작 규제가 필요한 표현에 대한 관심은 시들하다. 우리가 재판과 미네르바 재판에 국가적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사이, 국제사회는 ‘혐오표현’의 규제 필요성에 대한 합의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 여기에는 혐오표현이 현실적인 해악을 초래한다는 점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전제돼 있다. ‘혐오’라는 감정 자체를 규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혐오가 밖으로 드러나서 실질적인 해악을 창출하는 경우다. 혐오표현은 어떤 소수자(집단)에 대한 혐오에 근거해 편견, 차별, 배제, 적대를 조장한다. 이것이 초래하는 해악은 무척 현실적이다. 혐오표현이 소수자에게 실질적인 고통을 야기한다는 실증적 근거도 속속 제출되고 있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외국인 노동자를 학대하거나 차별하는 행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교수가 수업 시간에 이슬람 종교에 대한 편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대학에서 이슬람교도 학생들이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할 거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성소수자 혐오가 만연한 회사에서,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는 따돌림을 당하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승진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 혐오표현은 폭력으로 쉽게 전이된다는 사례도 무수하다. 지난 5월 제출된 유엔인권최고대표의 보고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물리적 폭력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회원국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을 금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혐오표현에 중립은 없다

혐오표현은 자정에 맡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소수자의 사회적 힘이 충분하다면 혐오표현은 얼빠진 사람이나 하는 실없는 소리로 전락한다. 이 정도라면 국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소수자가 ‘자연스럽게’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현실적으로도 소수자에게 ‘맞받아치면 되는 거 아니냐’ ‘무시하면 된다’는 조언은 한가한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가 인권보호를 위한 공적 개입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인권은 그렇게 ‘자정’에 맡긴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결국 어떤 표현을 금지할 것인지는 그 표현 자체가 아니라 그 ‘효과’의 심각성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표현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해악을 야기하거나 그런 해악과 직접적 연관이 있을 때만 규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공직자에 대한 ‘매우 저속하고 심한 욕설’이 초래하는 해악은 생각보다 미미하다. 반면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점잖게 드러낸 표현의 사회적 효과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구체적이다. 그래도 그 해악이 실감나지 않는다면, 혐한 시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일본에서 안전과 생계를 위협받는 재일 한국인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여전히 구체적인 해악이 없고 자정에 맡겨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니 국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겠는가?


출처: 한겨레 21 - <괴담 잡기에 쓸 힘 ‘혐오표현’ 잡기에 쓰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