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이재룡교수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 전 번역판도 있었다던데 문체가 좀 다르다고 한다만, 현재 시점에서 구해서 읽을 수 있는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판본이나 밀란쿤데라 전집 판본이 아닐까 싶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표지그림은 추상적인데 반해 밀란쿤데라 전집의 표지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인지 그걸 오마주 한것인지 모르겠지만 중절모를 쓴 남자의 뒷모습이 표지이다.
이야기가 주절주절 이어지기 때문에 가끔 주인공들의 내적갈등 부분에서는 좀 짜증 스럽기도 하다. 특히 토마시가 테레자에게 돌아가서도 망설이는 모습에선 짜증이 좀 폭발 했는데 이때 호르몬의 영향도 한 몫 했던것 같다.
네 남녀의 이야기가 큰 흐림이다. 자유연애를 표방하는 토마시의 삶과 죽음이 골자인것 같기도 하고... 체코가 배경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영화화 하면 어떻게 표현할까, 아마 지리멸렬한 사랑이야기로 풀어지겠지 싶었는데, 필립 카우프만이 감독하고 줄리엣 비노쉬가 테레자를 맡았던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목이 <프라하의 봄>으로 번역이 되었구만..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추가 하겠다.
또 어쩌면 클로져와도 맥락이 비슷한 영화인것 같기도 하다, 특히 사진을 찍는 줄리아 로버츠는 그림을 그리는 사비나와 비슷한것 같기도 하다. 테레자도 사진을 찍긴 했구나, 그런데 굳이 따지자면 테레자는 나탈리 포트만 쪽과 가까운것 같다.
사람의 존재는 순간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사람의 존재가 가볍다고 이야기 하는것이 그렇게 감동으로 와닿지는 못했는데, 이는 뜨거운 감정을 주고 받은 적이 없어서 그런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 허무주의로 끝나는 내 망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듯...
"es muss sein!" 독일어인지 체코어인지 잘 모르겠지만 소설속에서 중요하게 이야기 하는 "그래야만 한다"
토마시가 죽고나서 그의 존재하는 아들이 토마시의 비명을 마음대로 막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라고 적어버렸는데 이 부분은 고인을 위한 배려는 분명 아닐것 같은데, 어차피 비문은 산 사람이 보는 것이고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한 진실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 지니까 이런것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내 비문은 이렇게는 쓰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죽기전에 비문도 좀 정해놓고 죽어야 겠다.
똥 이야기를 키치를 성명하기 위해 예를 드는데 키치는 뭔지 모르겠고, 똥이야기는 그저 재미 있을 뿐이다.
p398-399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저절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은 우리의 직관과 체험을 넘어서는 무엇인가와 관련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존재 그 자체(어떻게 누구에 의해 주어졌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를 의심하는 사람과 주어진 존재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하는 사람들 간의 견해차도 이와 마찬가지로 엄존한다.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 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 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 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최근에도 책 속에서 똥이라는 단어가 점선으로 대체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윤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똥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똥과의 불화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똥을 누는 행위는 창조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질을 일상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똥은 수락할 만한 것이라거나 (그렇다면 화장실 문을 잠그고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또는 우리가 창조된 방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중에서.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상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에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직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직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p132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과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 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즉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