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천천히 - 고레에다 히로카즈
곧 개봉할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집.
이동진님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에세이집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그래서 마음에 점을 찍어 놓고 있었는데, 마침 친구의 친구가 이 책을 샀다고 해서 냉큼 빌려 달라고 했다. 책은 내내 차분하다. 하지만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중 일부를 옮겨 보면
p229
... 댐과 도로가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그것이 쓸데없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돈이 움직인다는 식의 구도가, 원전을 둘러싸고도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눈을 흐리는 큰 원인 중 하나는, 신문과 방송이라는 미디어가 벌써 망각 쪽으로 방향키를 돌렸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도 역시 기득권층의 이익 안에서 눈이 흐려져버린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실패까지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결국 문화로 성숙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에게 동물이 되라는 거소가 마찬가지다. 그것은 정치와 언론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하고, 가장 치졸한 폭력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그들과 함께 지냈던 도쿄 변두리의 고향을 그리워 하는 글도 많이 있다. 그 중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부분은 꼭 읽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에게는 내 목소리가 닿기 힘들어서 혹시나 다시 만나면 읽어 주기 위해 또 옮겨 적어 본다.
p205
<엄마의 등>
벌써 5년쯤 지났을까. 엄마와 함께 식사를 했다. 장소는 신주쿠였다. "고기가 작네"라든가 "비싸잖아"라고 실컷 투덜거리면서도, 어머니는 좋아하는 음식이었던 스키야키를 날름 먹어 치웠다.
헤어질 때 "그럼, 또 봐"라며 즐거운 듯 손을 흔들며 오후의 신주쿠 역으로 걸어들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어쩌면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라는 근거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등이 남쪽 출구의 개찰구에서 인파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동안 길에 서서 지켜봤다. 안타깝게도 그 예감은 현실이 됐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라는 후회에서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출발한다. 그렇기에 반대로 밝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어머니가 죽음을 향해가는 과정이 아니라, 삶의 한순간을 잘라내자. 그 순간 속에 가족의 기억에 대한 음영을 차곡차곡 담아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배웅했던 엄마의 뒷모습처럼.
물론 이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영화가 시작됐을 때 '아. 저기 엄마가 살아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우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다면 웃고 싶었다.
엄마와, 함께 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두번 본 사람에게 마음이 계속 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첫 눈에 반짝이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서 이토록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것 같다.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엄마를 잃은 슬픔에 잠겨있는 그 사람에게는 어떤 위안이 필요할까, 위안이라는 것이 필요 하기는 할까. 가뜩이나 공감능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어떻게 할줄도 모르고 뭐 사실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내가 오버하는것임.
여튼 에세이를 읽었다고 영화를 찾아보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겠다! 라고 결심 하긴 했지만, 그래도 <걸어도 걸어도>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