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것/책 2016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리베카 솔닛
마이토
2016. 3. 20. 09:45
원제는 Men explain things to me, 역자는 김명남
이 책을 읽는 중 부모님과 같이 과일을 먹고 있는데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난 금방 배운건 금방 써먹을 줄 알아서 결혼의 불평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고, 엄마는 그런 책 읽지 말라하고 아빠는 책의 제목을 물었다. 나는 책의 제목을 이야기 했고, 엄마는 그건 맞는 말이네 라고 하고, 아빠는 아빠 회사 여성 동료의 결혼 비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정년 보장과, 안정적인 노후를 어느정도 보장 받는 직업을 가진 "젊지만 결혼하기엔 다소 늦은 여자동료"들 5명 중 2명은 결혼에 대한 계획이 없으며, 세명 또한 대체적으로 생각하기에 다소 늦은 시기에 결혼은 했다고 한다. 부모님들은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않을까봐 겁내 하시는데, 왜 그것이 겁나는가에 대해 다시 물으면 아직 답을 해주지 않으신다, 혹시 내가 뒤늦게 결혼을 하고 싶어지면 그때는 짝이 생기기 힘들지 않겠느냐, 그리고 '싱싱한' 사위가 아니라 결혼을 이미 했던 사위를 맞이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일단.. 현재 나의 정체성으로 보아 부모님이 생각하는 '고추'달린 사위를 맞이할 확률은 지극히 희박해져 가고 있고, 나는 나와 공명할 수 있다면 장가나 시집을 두번을 갔건 세번을 갔건 개의치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싱싱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오히려 '결혼의 실패'를 경험 했던 사람이라면 결혼에 관해서 업그레이드 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
아무튼 빌려 읽은 책인데 중고서점에서 운 좋게 찾으면 구해서 매년 연례행사로 읽고 싶은 책이다. 자꾸 눈에 익히고, 자꾸 이야기하고, 타인을 설득하는 논리를 갖추기에 적당한 책이다.
차례는
1.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2. 가장 긴 전쟁
3. 호화로운 스위트룸에서 충돌한 두 세계: IMF, 지구적 불공정, 열차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 대한 몇가지 생각
4. 위협을 칭송하여: 평등결혼의 진정한 의미
5. 거미 할머니
6. 울프의 어둠: 불가해한 것을 끌어 안기
7. 악질들 사이의 카산드라
8. #여자들은다겪는다: 페미니스트들, 이야기를 다시 쓰다
9. 판도라 상자와 자원경찰들
1. (24) 그동안 많은 여자들은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과의 싸움에서 짓밟혔다. 내 세대의 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에게 더없이 간절한 미래 세대의 여자들도 그렇다. 여기 미국에서도 그렇고 파키스탄과 볼리비아와 자바에서도 그렇다. 하물며 우리 앞에 왔던 옛 세대의 무수한 여성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실험실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도서관에도, 대화에도, 혁명에도, 심지어 인간의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27) 어떤 남자들은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것은 사실 젠더화된 현상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대개 여자들은 지적했다. 여자들이 제 입으로 직접 겪는다고 말한 경험을 기각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우긴다는 점에서, 그 남자들이야말로 내가 그들이 종종 그런다고 말한 바로 그 방식으로 여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셈이라고(확실히 밝혀두는데, 여자들도 이따금 남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젠더 간 엄청난 힘의 격차가 악랄한 형태로 표출된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거니와, 젠더의 사회적 작동방식에 드러나는 거시적 패턴을 반영한 현상도 아니다.)
(28) 2008년에 '톰디스패치'를 통해서 이메일이 한통 왔다. 인디애나폴리스에 사는 연상의 남자인 발신인은 자신을 "여성을 사적으로든 직업적으로든 푸대접한 적이 한번도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나더라 "좀더 정상적인 남자들과 어울려야 했고, 최소한 글을 쓰기 전에 조사라도 약간 해봤어야 했다"라고 질책했다. 그러고는 인생살이에 관한 조언을 몇가지 제공하면서 내게 '열등의식'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볼 때 남자들에게 가르침을 당하는 일은 여자 스스로가 선택하는 경험, 혹은 겪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는 경험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몽땅 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30) 심금을 울린 글, 신경을 건드린 글, 그 글은 지금도 여기 저기에서 돌고 있다. 내가 그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요지는 나 자신이 유달리 많은 억압을 겪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경험한 종류의 대화들이 남자들에게는 공간을 열어주되 여자들에게는 닫아버리는 쐐기처럼 작용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을 뿐이다. 발언할 공간, 경청될 공간, 권리를 지닐 공간, 참여할 공간, 존중받을 공간, 온전하고 자유로운 한 인간이 될 공간을. 이런 현상은 점잖은 대화에서 권력이 표현되는 한 방식이다. 점잖지 않은 대화에서, 물리적 협박과 폭행에서, 또한 너무나도 자주 세상의 조직방식에서마저도.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서, 참여자로서, 권리를 지닌 인간으로서, 심지어는 너무나도 자주 살아 있는 존재로서마저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채 침묵시키고 지워내고 제거하려는 바로 그 권력 말이다.
4. (94)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 전통에 항의한다-극단적인 상황뿐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에도.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은 약간의 성과를 거두었고, 1970년대와 8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더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미국과 영국의 모든 여성이 그 혜택을 입었다. 또한 페미니즘은 위계 관계를 평등관계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동성결혼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주었다. 같은 성의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평등한 관계이다. 한쪽 파트너가 여러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좀더 힘을 지닐 순 있겠지만, 대개의 측면에서 그들은 서로 평등한 위치에 선 사람들끼리의 관계라서 자신들의 역할을 자기들 마음대로 규정할 수 있다.
(98) 아내의 인생은 아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것이었다.
이제 그런 시대는 단호히 문을 닫을 때가 되었다. 대신 다른 문을 열 때다. 모든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을 위해서 서로 다른 젠더들 사이의 평등과 결혼한 파트너들 사이의 평등을 반갑게 맞아들일 문을. 평등결혼은 위협이다. 불평등에 대한 위협니다. 평등결혼은 평등을 소중히 여기고 평등으로 혜택을 입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다.
6. (134) 두 겨울 산책
내게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 비공식적인 세계사가 이미 보여주었듯이, 헌신하는 개인들과 대중운동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으며 만들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떻게 이길지, 얼마나 걸릴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절망은 확실성의 한 형태다. 미래가 현재와 거의 같거나 현재보다 쇠락하리라고 믿는 확실성이다. 곤잘러스의 공감되는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절망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다. 마찬가지로 낙관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확신한다. 절망과 낙관은 둘 다 행동하지 않을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현실이 반드시 우리 계획과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 말로 희망일 수 있다. 창조력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낭만파 시인 존 키츠가 말했던 이른바 소극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에서 생겨날 수 있다.
(148) 내 친구 칩워드는 "계랑 가능한 것의 폭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측정 될 수 없는 것에 거의 언제나 우선한다는 뜻이다. 사익이 공익에, 속도와 효율이 즐거움과 품질에, 공리주의가 미스터리와 의미에 우선한다. 사실 우리의 생존에는, 또한 우리의 생존 이상의 차원에는, 또한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모종의 목적과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문명이 간직할 필요가 있는 다른 생명들에는 후자가 훨씬 더 유용한데도 말이다.
8. (186) 프리던의 선언 이래 페미니즘은 부분적으로나마 현상을 호명하는 전략을 통해서 진전했다. 가령 '성희롱'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에 처음 고안되었고, 80년대에 사법체계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1986년에 대법원으로부터 법적 지위를 인정 받았으며, 1991년에 대법관으로 지명된 클래런스 토머스에 대한 상원 청문회에서 한때 그의 직원이던 애니타 힐이 그의 성희롱을 증언함으로써 온 나라가 발칵 뒤집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당시 남자로만 구성된 질문자들은 힐을 가르치려 들면서 괴롭혔고, 상원뿐 아니라 온 세상의 많은 남자들은 상사가 음란한 말을 던지고 성적 써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혹은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9. (218) 어쩌면 지금 세상에서는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의 전쟁이 아니라-보수적인 여성과 진보적인 남성이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에 구분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성역할의 전쟁이다. 이것은 일각에서 위협과 분노를 느낄 만큼 페미니즘과 여성들이 꾸준히 전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강간과 살해 협박은 퉁명스러운 반응이다. 그보다 좀더 점잖은 반응은 팔우디와 [n+1]이 언급했던 기사들, 즉 여성들에게 여성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여성이 갈망해도 좋은 역할이 무엇인지, 갈망해선 안 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일러주는 기사들이다.